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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총격전 - 나가시노·시타라가하라 전투

  • 사무라이의 총격전 - 나가시노·시타라가하라 전투

아이치현 오쿠미카와 지역, 나가시노 성, 다미네 성과 나가시노·시타라가하라 전투

붙잡힌 도리이 스네에몬(鳥居強右衛門)은 나가시노 성(長篠城) 근처로 끌려갔습니다. 그를 붙잡은 사람은 전국시대 무장 다케다 가츠요리(武田勝頼)를 섬기던 사무라이였습니다. 다케다 군의 장수 가운데 한 명이 당시 36세였던 도리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료들에게 원군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하라. 즉시 항복하면 목숨은 보장한다”. 도리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불안해하는 동료 사무라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서는 외쳤습니다. "나가시노 성의 군사들이여,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공은 온다! 포기하지 마라!". 결국 가츠요리의 노여움을 산 스네에몬은 입고 있던 옷 등이 전부 벗겨진 상태로 기둥 두 개로 엮어만든 십자가에 큰 대자로 묶여 책형에 처해졌고, 나가시노 성이 보이는 건너편 강가에 내걸리게 되었습니다.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와중에 창이 그의 가슴을 관통, 영원히 입을 열 수 없게 되었습니다.

    鸟居强右卫门

▲사진:나가시노 성을 앞에 두고 책형에 처해진 나가시노의 영웅, 도리이스네에몬


훈련을 잘 받아 싸움에 능했던 다케다군은 전장에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였습니다. 다케다 가츠요리는 약 2년 전에 노다 성 전투 중에 저격당한 뛰어난 전술가이자, 장군인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아들이었습니다. 신겐은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인 미카와 지역(현 아이치현 동부)을 손에 넣고자 여러 차례 침공했는데, 그의 아들인 가츠요리는 신겐 사후 부친이 이루지 못한 그 업을 완수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다케다군은 그 몇 년 전에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에서 도쿠가와군을 쉽게 물리치고, 후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카텐진 성을 도쿠가와에게서 빼앗기도 했습니다.

1575년 5월 초, 5백 명의 사무라이가 주재해 있던 도쿠가와의 성 나가시노 성이 다케다 가츠요리가 이끄는 1만 5천 명의 군사의 공격을 받아 포위됐습니다.

아이치현 미카와 지역에 위치해 있는 나가시노 성은 도쿠가와가의 근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오카자키 성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에 축성되어 있어, 미카와로 진군하는 다케다군의 보급선에 있어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이 때문에 미카와를 차지하려는 다케다군은 그 초동조치로서 나가시노를 제압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나가시노 성

1508년에 축성된 나가시노 성은 두 개의 강이 합류하며 자연적인 해자를 형성하는 절벽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성이었고, 상대적으로 수비하기도 좋은 성이었습니다.

    나가시노 성터

▲사진:5백 명의 도쿠가와 우군과 1만 5천 명의 다케다군이 공방을 벌인 나가시노 성터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나가시노 성은 곧바로 포위되어 고립됐고, 도리이 스네에몬이라는 아시가루(최하급의 무사)가 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로 나서기까지 2주간의 농성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리이는 한밤중에 성을 빠져나와 차가운 강을 헤엄쳐 건넌 뒤 다케다군의 포위망을 빠져나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성인 오카자키 성까지 35km의 산길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러나 입성 직전에 다케다군의 병사에게 발견되어 붙잡혔습니다. 도리이의 용기 있는 행동과 희생으로 동료들은 사기를 얻었고, 그로부터 3일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의 연합 우군 3만 8천 명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나가시노·시타라가하라 전투

기존의 무기와 갑옷을 비롯해, 오다군의 병사들은 각각 가늘고 긴 목재를 가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 3천 명은 화승총도 휴대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30년 전에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들어온 총포는 곧바로 사무라이에게 받아들여졌지만, 이 정도 규모로 사용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오다군의 병사가 가지고 나르던 목재는 나가시노 성에서 멀지 않은 완만한 언덕 기슭에 있는 시타라가하라 서쪽에 간이 울타리를 구축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이 울타리 뒤에서는 도쿠가와와 오다의 군세가 대기하고 있었고, 반대편 동쪽에서는 다케다군이 낮은 산의 경사면에서 진용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양군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는 논으로 둘러싸인 렌고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시타라가하라의 마방책(馬防柵)

▲사진:재현된 시타라가하라 전장의 목재 울타리


1575년 5월 21일 아침, 다케다군의 병사들에게 출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렁차게 외치며 좁은 전투장으로 출격한 병사들은 먼저 걷기도 어려운 논 진흙탕을 지나게 됐고, 그 다음에는 렌고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리고 강을 빠져나오면, 다시 논이 있었고, 이를 모두 넘어서야만 겨우 울타리 앞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고, 겨우 도착한 군사들도 오다군의 총포 부대에 순식간에 격파되어 갔습니다.

    시타라가하라 결전장 축제

▲사진:매년 6월, 시타라가하라 결전 축제에서의 결전 재현은 실제 전투 장소에서 개최됩니다
 

    시타라가하라 결전장 축제

▲사진:갑옷을 착용하고 실제 화승총을 지닌 나가시노 총포 부대가 전투를 재현합니다. 화약만 사용한 화승총은 발포와 함께 큰 총성을 울리며, 짙은 연기를 냅니다. 매우 귀중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가츠요리는 화승총 장전은 빨라도 30초의 시간이 필요하며, 전투 상황에서는 그 속도로 재장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일제 사격 후, 가츠요리는 미처 연기가 없어지기도 전에 두 번째 돌격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몇 초 만에 그들도 화승총의 일제 사격으로 잇따라 패했습니다. 경악한 가츠요리는 또다시 돌격을 명했지만, 강을 건너기도 전에 패했고, 울타리를 향해 돌격하는 다케다군의 병사들은 모두 화승총에 희생되어 갔습니다.

    나가시노 전투 노보리 축제

▲사진:매년 5월에 개최되는 나가시노 전투 노보리(군기) 축제에서는 화승총 사격 시연과 함께 나가시노 성 안뜰에서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전투를 재현합니다.


노부나가는 단발 화승총의 결점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총포 부대를 3열로 배진해, 제1열 발포 후 제2열이 정위치에 서 발포, 후에 제3열이 정위치에서 발포하도록 해, 제3열 발포가 끝날 무렵에는 제1열이 재장전을 마치고 발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머신건과 같은 방식으로 화승총의 약점을 보완하여 일제 사격을 계속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전투는 8시간 동안 계속됐고, 다케다군에서는 1만,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에서는 6천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다케다군은 패했고, 오다 노부나가의 명성과 힘이 드높아지며, 일본의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쟈즈가 성(蛇頭城) – 다미네 성(田峯城)의 뱀

    다미네 성

패했다고 생각한 다케다 가츠요리와 가신 스가누마 사다타다(菅沼定忠)는 전장에서 도망쳐, 스가누마의 본성인 다미네 성, 별칭 쟈즈가 성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도착한 뒤에 성을 맡고 있었던 사다타다의 숙부 스가누마 사다나오(菅沼定直)가 오다 쪽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쫓긴 그들은 약 20km 떨어진 스가누마 가문의 부세츠 성(武節城)으로 도망쳤습니다.

    다미네 성 고죠인

▲사진:다미네 성에서 인기 있는 고죠인(도장 등이 찍혀 있는 증명서)
 

    다미네 성

▲사진:다미네 성은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등장. 성주 스가누마 사다타다와 그 가신들은 다케다 가츠요리와 함께 싸우고 이 성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배신당해 쫓겨났습니다.


배신을 당한 사다타다는 후에 죽었다고 속이고 다미네 성의 경계를 풀어 충신들과 함께 급습해 성을 탈환하고 숙부인 사다나오를 붙잡았습니다. 사다나오는 배신자 100명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7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케다 가문은 멸족했고, 힘을 키워가는 도쿠가와를 두려워한 사다타다는 다미네 성을 떠나, 성은 후에 도쿠가와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다미네 성은 방치되었지만, 성터는 비교적 좋은 상태로 유지되어, 수많은 연구와 재건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재건된 것 중에는 성주들의 거관, 망루, 문, 담 등이 있어, 전국시대 성의 경관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나가시노, 다미네, 전장

1576년에 나가시노 성은 내버려지게 되었고, 근처에 위치한 신시로 성(新城城)으로 대체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일본성곽협회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한 곳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다케다군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보호한 강과 절벽 등 자연의 요새 외에도 해자와 흙으로 쌓아올린 성채가 남아 있으며, 다양한 전시물을 보존하고 있는 ‘나가시노 성터 사적 보존관’도 있습니다. 주변 지역에서는 다케다군의 진영 터와 도리이 스네에몬이 책형된 장소 등에도 방문하실 수 있습니다.

    나가시노 성터 사적 보존관

▲사진:나가시노 성터 옆에 위치한 나가시노 성터 사적 보존관에서는 성터와 전투에 관한 풍부한 전시와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나가시노(시타라가하라) 전투가 행해진 교전터는 일본의 교전터 중에서도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며, 충실하게 재현된 수백 미터 길이의 목재 울타리(마봉책)를 통해 450년 전의 전투를 회상해보실 수 있습니다. 울타리에서는 논과 렌고 강 넘어 과거에 다케다군이 포진해 있던 곳까지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교전장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나 다케다군의 수많은 야영지 터를 방문해 보세요. 현재는 거의 일본어로만 표기되어 있으나, 사적이나 비석이 기재된 지도도 입수하실 수 있습니다.

    시타라가하라 역사 자료관

골짜기 동쪽에 있는 ‘시타라가하라 역사 자료관’에는 전투와 관련된 풍부한 유물과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50개가 넘는 화승총 전시 섹션도 있어, 3.32미터의 장대한 것부터 40센티미터의 작은 것까지 다양한 화승총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고지도와 두루마리, 그림, 비디오 프레젠테이션 등을 관람할 수 있으며, 갑옷과 투구, 무구나 진도병풍 등도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나가면 재현된 전장의 울타리를 골짜기 반대편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 된 정보는 적지만, 알기 쉽게 전시되어 있어,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시타라가하라 역사 자료관

▲사진:충실하게 전시되어 있는 시타라가하라 역사 자료관은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매년 5월에는 갑옷을 입고 실제 화승총을 손에 든 나가시노 총포 부대에 의해 전투 모습이 재현됩니다. 화약만을 사용한 화승총은 발포와 함께 큰 총성과 불꽃, 짙은 연기를 냅니다. 이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나가시노 총포 부대

이같이 잘 보존된 고전장과 박물관은 일본의 역사와 사무라이 팬, 군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꼭 방문해야 할 볼거리 넘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의 역사를 더 깊게 체험하고 싶으신 분들은 가까이에 위치한 나가시노 성과 보존관, 다미네 성도 방문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크리스 글렌(Chris Glenn)

크리스 글렌(Chris Glenn)

호주 애들레이드시 출신. 1993년부터 나고야 FM 라디오국 'ZIP-FM'에서 라디오 DJ로 활약 중. 최근에는 라디오 DJ뿐만 아니라, 칼럼 집필, 영문 웹사이트 등에 영문 에세이 게재 외, 인바운드 관광 어드바이저로서 정보 제공에 관한 컨설팅 및 강연을 실시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 중이다.